1700년 한국불교의 정통법맥을 이어온 韓國佛敎 太古宗
<불교의 삼보> 불교에서 가장 가치 있고 귀중하게 여기는 세 가지 보배라는 뜻으로 ‘부처님(佛)’과 ‘부처님이 설하신 법(法)’, 그리고 그 가르침을 수행 실천하는 ‘스님(僧)’을 말하는 것입니다 삼보 가운데서도 중심이 되는 것은 ‘법’, 즉 부처님께서 깨닫고 가르친 진리입니다. 불(佛)은 법(法)를 깨우친 분이며, 승(僧)는 법을 이해하고 실천함으로써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도달하고자 뜻하는 수행자를 말합니다. 불보(佛寶) 부처님의 원래 말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깨달은 자’를 뜻하는 ‘붓다(Buddha)’를 음역한 ‘부처’를 높여서 부르는 말입니다. 중국어로 한역(漢譯)하면 ‘불타(佛陀)’라고 하며 흔히 약칭하여 ‘불(佛)’ 이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깨달음을 얻은 자는 누구나 부처이고 또 깨달음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으므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경전에 의하면 석가모니불 이전에도 여러 부처님이 계셨고 미래에는 미륵불이 출현할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불사상(多佛思想)은 기원전 1세기경 나타난 대승불교에서 더욱 발전하여 과거불, 미래불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다른 세계에 무수한 부처들이 있어 법을 가르치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부처님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혹은 형상에 따라 숫자에 관계없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부처, 즉 불타는 BC 6세기쯤에 인도 카필라국에서 출생하여 태자(太子)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일체의 번뇌를 끊고 우주의 참진리를 알아서 깨달음을 이루어 중생을 위해 설법하고 깨우쳐 주었던 석가모니을 존경하여 일컫어 부르고 있습니다. 법보(法寶) 법(法)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다르마(Dharma)’의 한역어(漢譯)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부처님께서 깨달은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법이란 부처님께서 스스로 깨달은 현상세계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전하고 해석한 것이 불교경전인 것입니다. 초기의 불제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법’과 ‘율’이라는 두 가지로 분류하였고 나중에 이 법은 경장으로, 율은 율장으로 발전하였으며 이것들을 주석한 논서들은 논장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이 경장 율장 논장을 삼장(三藏)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삼보중의 법보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교법(敎法)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마지막 설법에서 “네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라”라고 하셨으며 “내가 설한 법과 율이야말로 내가 멸한 후 그대들의 스승이 되리라.” 라고 한 것 등은 모두 법(法)의 절대적인 영원 불변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승보(僧寶)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상가(sagha)를 한역(漢譯)하여 ‘승가(僧伽)’또는 줄여서 ‘승(僧)’이라고 하는데 원래는 ‘일정한 목적을 위하여 사람들이 하나로 연합된 단체’를 일컫는 말이었으나 불교에서는 출가수행자(出家修行者)의 교단(敎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승가(僧伽)의 출가수행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닦고 실천하며, 널리 펼치고, 발전시키고, 번역하고, 유지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더불어 귀중한 불교의 삼보로써 존중되어지고 있습니다. 최초의 승가는 석가모니께서 깨달음을 얻은 후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서 함께 수행한 적이 있는 다섯 수행자를 교화(敎化)하여 제자로 삼았는데, 이때 처음으로 승가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초기에는 출가수행자인 비구(比丘) · 비구니(比丘尼)만 아니라, 재가신자(在家信者)인 우바새(優婆塞:近善男 재가남성신자) · 우바이(優婆夷:近善女 재가여성신자)를 포함한 4부대중(四部大衆)으로 구성되었으나, 점차 출가수행자의 단체만을 일컫는 말이 되었습니다. |
불교의 특징 불교의 세계관 역시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을 수립하고 있습니다. 초기 교리에서 불교의 세계관은 오온설(五蘊設)과 12처설(十二處設)인데 여기서 인식의 주체가 되는 여섯 개의 감각기관은 바로 인간존재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시작은 인간의 괴로움을 해결하는 문제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본래부터 괴로움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며 절대적인 신에게 의존하는 나약한 죄인이 아니라 존재의 참다운 모습을 파악할 수 있고 자리이타의 삶을 구현할 수 있는 불성을 가진 존재인 것입니다. 또한 대승불교의 유식사상은 인간의 선성과 악성 등 깊은 성품까지도 설명하여 인간의 내용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유일신의 신앙에서는 이 세계를 절대의 신이 생성, 유지, 파괴한다고 하지만 불교에서는 이 세계는 인간이 지은 업력(業力)에 의하여 생성하기도 하고 파괴되기도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불교는 바로 인간을 구하기 위한 인간의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불과 평등의 종교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성불(成佛)에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구원이란 궁극적으로 스스로 온갖 괴로움을 극복하고 열반에 이르는 것 즉 성불(成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한한 생명과 자유이상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서구의 종교는 초월신의 전지전능한 힘에 의지하여 이루려고 하는데 비해 불교는 근본적으로 초월신을 부정하고 인간의 생명 속에 내재된 불성을 발견하고 수행을 통하여 이를 구현하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부처님은 신이나 구세주가 아니라 항상(恒常) 하는 진리에 눈 뜬 사람이며 깨친 사람일 뿐인 것입니다. 연기(緣起)의 진리는 부처님의 출세 이전에도 있었으며 이후에도 항상(恒常)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부처가 되고자 하는 성불의 종교인 것이며 따라서 불교는 부처와 인간은 본질적으로 평등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서구의 종교는 완전하게 신에게 의탁하여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절대의 타력주의(他力主義)의 신앙인데 반하여 불교는 평등의 원리에 입각하여 자력에 의한 가장 합리적인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수행의 종교 다른 종교와 그렇지만 불교 또한 믿음의 종교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할 것입니다. 불교에서의 믿음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한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바탕위에서 설정된 합리적인 믿음입니다. 진리의 바탕위에 근거한 믿음이야 말로 맹신이나 미신이 아닌 올바른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과 더불어 올바른 실천, 즉 수행이 따라야 하는데 이것 또한 불교의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다른 신앙에서 오로지 절대자의 선택이나 기도 또는 공희(供犧=공양으로 바치는 희생)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하지만 불교는 자신의 체계적인 수행에 의하여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지혜와 자비의 종교 우리는 수많은 번뇌로 인하여 사물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가지가지의 괴로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상을 바르게 사는 것도 중생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것도 지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지혜는 단순히 사물을 분별하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상(實相)을 바로 비추어 보는 참다운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지혜가 있다 할지라도 중생을 위한 자비가 없다면 이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지혜와 더불어 자비의 실천이야 말로 진정한 종교로서의 불교가 가지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자력의 종교 불교는 인간의 문제는 부처님이나 어떤 절대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노력과 의지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철저한 자력(自力)의 종교입니다. 따라서 불교는 밖으로부터의 메시지의 전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각(自覺)으로 출발합니다. 진리는 각자 스스로에 있고 의지할 곳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일 뿐인 것입니다. 팔십의 나이로 사라쌍수 아래서 입멸하기 직전 제자들에게 들려준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하여라. 모든 것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